
[비건뉴스=최유리 기자] 유럽연합(EU)이 식물성 제품에 ‘소고기(beef)’, ‘돼지고기(pork)’, ‘닭고기(chicken)’ 등 전통적으로 동물성 식품에 쓰이던 용어의 사용을 제한하는 방안을 추진하면서, 이를 둘러싼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European Commission)는 총 29개의 ‘고기 유사 표현(meaty terms)’을 식물성 제품의 라벨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내용을 담은 새로운 제안을 발표했다.
이번 제안은 소비자에게 식품의 구성 성분과 영양 정보를 보다 명확하게 전달하겠다는 취지에서 마련됐지만, 식물성 식품 관련 업계와 시민단체들은 해당 조치가 오히려 소비자의 알 권리를 침해하고, 식물성 대체식품의 성장을 억제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특히, 소비자들이 식물성 버거나 소시지에 ‘버거’나 ‘소시지’라는 용어가 붙어 있다고 해서 혼동하거나 오인 구매하는 사례는 매우 드물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유럽채식연합(European Vegetarian Union)의 라파엘 핀토 정책 담당자는 “EU의 여러 국가에서 수집된 자료를 보면, 소비자들이 고기 유사 용어를 보고 식물성 제품을 실제 고기로 오해해 구매하는 일은 거의 없다”며 “이번 제안은 소비자 보호가 아니라 오히려 창의적이고 지속가능한 식품 산업을 위축시키는 조치”라고 비판했다.
오스트리아 비건협회 회장 펠릭스 흐나트도 “지난 15년간 오스트리아에서는 관련 용어로 인한 혼란 사례가 단 한 건도 없었다”며, 육류 업계의 로비가 작용한 결과라고 주장했다.
사실 식물성 제품이 시장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최근 몇 년 사이 환경 보호와 동물복지, 건강한 식단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유럽 전역에서 식물성 대체식품 소비가 급증했다.
이에 따라 ‘식물성 버거’, ‘채식 소시지’ 등 다양한 형태의 제품들이 대형 유통망에 진입하고 있으며, 포장지에는 소비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기존 고기 명칭을 차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처럼 ‘고기’를 연상시키는 단어의 사용이 소비자를 혼란스럽게 만든다는 지적도 꾸준히 제기돼왔다.
문제는 이와 관련된 명확한 법적 기준이 아직 마련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2020년 유럽의회에서는 식물성 식품에 ‘버거’와 ‘소시지’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두 건의 수정안을 부결시킨 바 있으며, 2023년 10월 유럽연합 사법재판소는 식물성 대체식품의 성분이 명확하게 표시돼 있다면 전통적인 동물성 식품의 명칭 사용을 금지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런 판례와 정책 흐름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다시 등장한 금지 제안은 유럽연합이 추진 중인 ‘단백질 다양화 계획(protein diversification plan)’과도 정면으로 충돌한다. 이 계획은 식물성 단백질의 국내 생산 확대를 목표로 하며, 지속가능한 식량 체계로의 전환을 장려하는 취지를 갖고 있다.
결국 이번 제안은 소비자 보호라는 명분 아래 육류 산업의 이해가 개입된 ‘정치적 조치’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식물성 식품 시장의 확대가 불가피한 흐름으로 자리잡은 상황에서, 라벨링에 대한 법적 기준과 명확한 가이드라인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커지고 있다.
고기와 식물성 제품 간의 경계가 점점 흐려지는 지금, 식품명 표기에 대한 공정하고 합리적인 기준을 세우는 일이 EU뿐만 아니라 글로벌 식품 산업 전반에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