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건뉴스=최유리 기자] 기후 변화는 인간의 삶의 방식뿐만 아니라 감정에도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최근 국제 공동연구팀이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폭염은 단순히 신체적 불편을 주는 것을 넘어 우리의 정서를 바꾸고 있으며, 이러한 현상은 전 세계적으로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다.
연구진은 2019년 한 해 동안 157개국에서 작성된 12억 건의 소셜미디어 게시물을 분석했다. 65개 언어로 쓰인 글을 인공지능 프로그램으로 분석해 긍·부정 점수를 매기고 이를 각 지역의 기온 데이터와 비교한 결과, 기온이 섭씨 35도(화씨 95도)를 넘어설 경우 정서적 변화가 뚜렷하게 나타났다.
저소득 국가에서는 게시물의 부정적 표현이 약 25% 증가했으며, 고소득 국가는 약 8% 증가에 그쳤다. 연구를 이끈 중국과학원의 왕장하오 박사는 “소셜미디어 데이터는 문화와 대륙을 넘어 인류의 감정을 실시간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전례 없는 도구”라며 “이번 연구는 기온이 인간의 정서에 미치는 영향을 거대한 규모에서 측정할 수 있게 했다”고 설명했다.
연구진은 세계은행 기준에 따라 1인당 연간 소득 1만3845달러를 경계로 국가를 분류했다. 저소득 및 중간소득 국가일수록 폭염에 따른 정서적 타격이 훨씬 더 컸다. 이는 부유한 나라들이 냉방시설과 의료 시스템, 인프라 등에서 더 나은 대응 수단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듀크대학교의 판이춘 연구원은 “저소득 국가 사람들은 고소득 국가에 비해 폭염으로 인한 정서적 악화 폭이 3배나 크다”며 “향후 기후 영향 평가에서 반드시 ‘적응’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MIT의 정스치 교수 역시 “기온 상승은 단지 건강이나 경제 생산성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의 일상적인 감정과 행복에도 영향을 미친다”며 “기후 스트레스가 인류의 행복을 어떻게 재편하고 있는지 이해하는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평가했다. 연구진은 트위터와 중국 웨이보 게시물을 인공지능 언어모델 BERT로 분석해 정서 점수를 산출했으며, 전 세계 2988개 지역의 기후 데이터와 교차 비교했다.
연구는 현재 상황에 그치지 않고 미래 전망까지 제시했다. 기후모델을 통해 2100년까지의 변화를 예측한 결과, 사람들의 일정한 적응을 감안하더라도 세기 말까지 전 세계 정서적 행복감은 폭염으로 인해 평균 2.3% 감소할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로리에이트 뇌연구소의 닉 오브라도비치 연구원은 “날씨와 기후 변화는 인간 감정을 전 지구적 차원에서 흔들고 있다”며 “정서적 충격에 대한 개인과 사회의 회복력을 높이는 것이 기후 적응 전략의 핵심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연구의 의의는 기후 변화를 바라보는 시각을 확장했다는 점에 있다. 지금까지 기후 연구는 신체 건강, 경제적 피해, 환경 파괴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번 연구는 기온 상승이 인류의 정서적 안녕을 위협하며, 보이지 않는 ‘정서적 오염’을 확산시킨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다만 연구진은 소셜미디어 사용자가 인구 전체를 대변하지는 못한다는 점을 한계로 지적했다. 특히 어린이와 노인은 소셜미디어 이용이 적지만 폭염에 더 취약하기 때문에 실제 정서적 타격은 연구에서 측정된 것보다 더 클 가능성이 있다.
이번 연구는 MIT 지속가능 도시화 연구소가 주도한 ‘글로벌 감정 프로젝트(Global Sentiment Project)’의 성과로, 연구진은 모든 데이터를 공개해 정책 입안자와 지역사회가 폭염 시대에 대비할 수 있도록 했다. 정 교수는 “우리는 이번 연구가 연구자와 정책결정자들이 기후 변화에 맞서 더 나은 준비를 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지구 평균 기온이 계속 오르는 상황에서, 기후 변화의 정서적 영향을 이해하는 것은 더 이상 부차적인 문제가 아니다. 이번 연구는 기후 변화가 단순한 환경 문제나 경제 과제가 아니라 전 지구적 정신 건강 위기라는 사실을 보여주며, 특히 가난한 국가일수록 더 큰 위험에 직면해 있음을 경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