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건뉴스=박민수 기자] 경남 합천에 위치한 해인사는 천 년 가까운 세월 동안 세계적인 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을 보존해 온 사찰이다. 팔만대장경은 고려 시대 국가적 위기 속에서 조성된 목판 경전으로, 불교 신앙을 넘어 민족의 정신적 토대이자 과학·예술·신앙이 결합된 기록문화의 결정체로 평가된다. 이 방대한 불사는 국가 기관이었던 장경도감을 중심으로 진행됐으며, 그 과정에는 수많은 장인과 승려, 지역 사회, 후원자들이 참여했다. 정이품 참지정사를 지낸 정안 역시 팔만대장경 판각에 기여한 인물로 전해진다. 오늘날 해인사에 봉안된 ‘정안(鄭晏)의 신위(神位)’는 그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팔만대장경이 개인의 업적이 아닌 공동체의 결실이었음을 보여준다.
이 같은 장경도감의 전통은 과거의 역사로만 머물러 있지 않다. 최근 해인사 인근 옛 해인초등학교 치인리 부지에서는 팔만대장경 판각 기술을 계승하기 위한 교육과 연구 활동이 이어지고 있다. 이곳에서는 전통 목판 판각을 배우는 과정이 운영되며, 승려뿐 아니라 일반인과 연구자 등 다양한 참여자들이 기록문화의 정신을 직접 체득하고 있다. 해인사는 목판을 단순히 보존하는 데 그치지 않고, 판각 기술을 배우고 전수하는 과정을 통해 장경도감의 역할을 오늘날에 맞게 재해석하고 있다. 장인과 수행자, 연구자가 함께 호흡하는 모습은 고려 시대 장경도감을 연상시키며, 전통 기술과 불사 정신이 현재형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현대의 판각 교육은 단순한 기술 전수에 그치지 않는다. 기록문화와 신앙, 공동체 정신을 함께 계승하는 과정으로 인식되며, 팔만대장경이 지닌 역사적 의미를 현재의 언어로 풀어내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는 전통 문화유산이 과거의 성취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선택과 실천을 통해 미래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팔만대장경 조성에 참여했던 수많은 고려 사람들처럼, 오늘날의 승려와 장인, 연구자들도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문화유산 계승에 힘을 보태고 있다. 정안의 신위가 상징하는 공덕은 특정 인물의 공로를 넘어, 공동체가 함께 지켜 나가야 할 문화적 책임을 환기한다. 해인사에서 이어지는 판각의 시간은 팔만대장경이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숨 쉬는 문화임을 보여주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