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건뉴스=김민영 기자] 미국 서부는 최근 수십 년 사이 산불 피해가 급격히 늘어나며 사회·경제적 위기가 심화되고 있다. 불길은 예전보다 더 오랫동안 타오르고, 열기는 강해졌으며, 과거에는 산불이 거의 발생하지 않았던 지역으로까지 번지고 있다. 기온 상승과 가뭄이 직접적인 원인으로 꼽혀왔지만, 과학자들은 또 다른 변수로 ‘번개’를 지목하고 있다. 갑작스럽고 강력한 번개가 산불을 촉발하는 주요 요인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것이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서부 지역에서 번개는 이미 산불로 인한 피해 면적의 3분의 2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여기에 기후 변화가 겹치면서 번개로 인한 발화 가능성은 더욱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따뜻해진 공기는 더 많은 수분을 품게 되고, 이는 불안정한 기상 패턴을 만들어 번개 발생 빈도를 높인다. 최근 발표된 한 연구는 서부 지역의 98%에서 2030년대 초반부터 번개로 인한 산불 위험일이 늘어날 것이라고 밝혔다.
특히 오리건, 아이다호, 몬태나 등 북서부 주들은 2060년대까지 여름철 번개가 내리는 날이 최대 12일가량 더 많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 같은 변화는 기존의 산불 발생 지역에 또 다른 위험 요인을 얹는 셈이다. 다만 북서부 지역은 극심한 고온과 건조 현상이 다른 지역만큼 빠르게 악화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무와 풀을 직접 때리는 땅-구름 번개는 크게 늘어날 것으로 예측돼 결코 안전지대라 할 수 없다.
반대로 남서부 지역은 번개 발생이 크게 증가하지 않을 것으로 분석됐다. 그러나 산불 위험은 더 빠른 속도로 높아질 전망이다. 콜로라도, 와이오밍, 애리조나, 뉴멕시코 등은 극심한 건조와 폭염, 부족한 강수량으로 인해 작은 불씨도 대형 산불로 번질 가능성이 높다. 연구진은 남서부가 북서부보다 오히려 더 큰 산불 증가세를 보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번개 횟수 자체보다 기후 변화가 불러온 건조일수 증가가 더 치명적이라는 설명이다.
이번 연구를 이끈 캘리포니아대 머세드 캠퍼스 드미트리 칼라시니코프 연구원은 기존 기후 모델이 번개를 제대로 시뮬레이션하지 못하는 한계를 지적했다. 이에 연구팀은 기온, 습도, 대기 수분량 등 측정 가능한 변수를 토대로 기계학습을 적용해 번개 발생을 예측하는 모델을 개발했다. 여기에 1968년부터 사용돼온 산불 기상 지수(FWI)를 결합해 2030년부터 2060년까지의 산불 위험도를 전망했다. 이는 세기 말에 초점을 맞춘 기존 연구보다 수십 년 앞선 시점을 내다본 것이다.
칼라시니코프 연구원은 앞으로 건번개와 습번개의 차이를 구분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비가 거의 동반되지 않는 건번개는 산불을 일으키는 반면, 많은 비를 동반하는 습번개는 산불 위험을 줄일 수 있으나 홍수 가능성을 높인다. 이를 구체적으로 구분하면 긴급 대응 체계가 보다 정밀하게 작동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결국 기후 변화는 미국 서부를 단순히 더 덥고 건조한 땅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번개와 폭풍을 동반한 불안정한 지역으로 바꾸고 있다. 번개가 더 많은 불씨를 제공하고, 산불은 더 많은 연료를 만나 되려 확산하는 악순환이 형성되고 있다. 이는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 불과 수십 년, 어쩌면 이미 시작된 변화일 수 있다. 연구진은 고위험 지역 주민들이 더 큰 더위와 연기, 그리고 잦아지는 산불에 대비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이번 연구 결과는 학술지 ‘어스 퓨처(Earth’s Future)’에 게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