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0.14 (화)

  • 흐림서울 16.5℃
  • 흐림인천 16.9℃
  • 흐림원주 15.8℃
  • 수원 17.3℃
  • 청주 18.2℃
  • 흐림대전 19.4℃
  • 흐림대구 19.1℃
  • 흐림전주 23.2℃
  • 흐림울산 19.5℃
  • 흐림창원 20.9℃
  • 흐림광주 22.1℃
  • 흐림부산 21.7℃
  • 맑음목포 22.9℃
  • 맑음제주 26.3℃
  • 흐림천안 17.6℃
  • 흐림구미 18.3℃
기상청 제공

비건

EU, ‘식물성 버거’ 금지 논란…“소비자 혼란” vs “지속가능성 역행”

 

[비건뉴스=최유리 기자] 유럽연합(EU) 의회가 식물성 대체육 제품의 라벨에 ‘버거’나 ‘소시지’ 등 육류 관련 명칭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찬성 측은 소비자 혼란 방지를 이유로 들었지만, 반대 측은 “과학적 근거 없는 시대착오적 결정”이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유럽의회는 지난 10월 8일(현지시간) 본회의에서 식물성 대체육 제품에 ‘비프(소고기)’, ‘베이컨’, ‘에그 화이트(달걀 흰자)’ 등 육류 관련 용어를 표기하지 못하도록 하는 개정안을 표결에 부쳤다. 찬성 355표, 반대 247표, 기권 30표로 가결된 이번 조치는 유럽 내 대체육 산업의 라벨링 규제 논의를 본격화했다.

 

이번 개정안은 프랑스 출신 의원 셀린 이마르가 지난 7월 공동시장기구(CMO) 규정 검토 과정에서 제안한 것으로, 식물성 제품이 ‘버거’나 ‘스테이크’ 등 전통적인 육류 명칭을 사용하는 것을 제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법안은 이미 지난달 유럽의회 농업위원회의 찬성으로 본회의 표결이 예고된 바 있으며, 향후 EU 집행위원회·이사회·의회 간 삼자 협상(Trilogue)을 통해 27개 회원국이 최종 법제화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보수 성향이 강한 유럽의회 다수파는 “식물성 제품이 육류와 유사한 명칭을 사용할 경우 소비자들이 혼란을 겪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수의 여론조사와 전문가 의견은 이러한 주장에 근거가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유럽소비자기구가 2020년에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80%가 “식물성 제품도 ‘버거’ 등 명칭을 사용할 수 있다”고 답했으며, 지난해 실시된 스마트프로틴 조사에서도 단 9%의 유럽 시민만이 “대체육 제품을 실제 육류로 혼동한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식물성 식품 단체와 환경단체는 이번 결정을 “혁신을 가로막는 정치적 판단”으로 규정하고 강한 유감을 표했다. ProVeg International의 자스미인 더 부 대표는 “유럽은 세계 최대의 대체육 시장으로, 이 산업은 유럽 농민에게도 새로운 소득 기회를 제공한다”며 “이번 결정은 농업과 기후 대응 모두에 역행한다”고 비판했다. 그는 “EU에는 이미 허위 표시를 막는 강력한 법 체계가 존재한다”며 “추가적인 용어 금지는 행정 혼란을 초래하고, 단일시장의 통합 원칙을 훼손한다”고 덧붙였다.

 

유럽채식연합(European Vegetarian Union)의 라파엘 핀토 정책매니저 역시 “소비자들은 혼란스럽지 않다. 오히려 이런 금지가 더 큰 혼란을 부를 것”이라며 “지속가능성과 소비자 선택권을 해치는 불필요한 규제”라고 지적했다.

정치권 내부에서도 논란은 이어졌다.

 

녹색당 소속 안나 스트롤렌베르그 의원은 “지구가 불타고, 유럽이 전쟁과 기후 위기에 직면한 상황에서 ‘버거’ 단어를 두고 논쟁하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육류 로비가 혁신적인 식품 기업과 전환 중인 농민을 방해하고 있다”며 “진정으로 농민을 돕고 싶다면 더 공정한 계약과 안정적인 소득을 보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흥미롭게도, 보수 진영 내부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다. 프랑스 중도우파 유럽국민당(EPP) 대표 만프레드 베버는 “소비자는 어리석지 않다. 슈퍼마켓에서 자신이 무엇을 사는지 충분히 알고 있다”고 언급하며 자당 의원들의 결정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이번 표결은 지난주 200여 개 기업과 시민단체가 EU 의회에 ‘버거 용어 금지’ 반대 청원을 제출한 직후 이뤄졌으며, 이후 지지 단체는 400곳으로 확대됐다. 기후행동연합 WePlanet의 롭 드 슈터 대변인은 “상식이 승리할 때까지 유럽 전역의 파트너들과 협력하겠다”며 “지속가능한 대체육 산업이 유럽에서 자라날 수 있도록 싸움을 멈추지 않겠다”고 밝혔다.

 

EU는 지난 수년간 대체육 라벨링 문제를 놓고 논쟁을 이어왔다. 지난해 유럽사법재판소(ECJ)는 “회원국이 독자적으로 식물성 제품의 육류명칭 사용을 금지할 수 없으며, 정의 절차를 거친 EU 차원의 결정만이 가능하다”고 판결한 바 있다. 그럼에도 이번 의회의 결정으로 논의는 다시 정치적 국면에 들어섰다.

 

식물성 식품 산업계는 이번 사안을 단순한 라벨링 이슈가 아닌 ‘기후 위기 시대의 방향성’ 문제로 본다. 지속가능한 식품 체계로의 전환이 전 세계적으로 가속화되는 가운데, EU의 이번 결정은 “후퇴한 행보”라는 비판이 거세다.

 

결국 이번 사안은 단순한 단어 싸움이 아니다. 유럽이 미래 식품정책의 주도권을 지속가능성과 혁신에 둘 것인지, 전통 산업 보호에 둘 것인지에 대한 시험대가 되고 있다.

배너
추천 비추천
추천
0명
0%
비추천
0명
0%

총 0명 참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