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5.23 (금)

  • 구름많음서울 18.2℃
  • 구름조금인천 16.9℃
  • 구름많음원주 17.5℃
  • 맑음수원 17.4℃
  • 맑음청주 18.1℃
  • 맑음대전 18.5℃
  • 맑음대구 19.0℃
  • 맑음전주 19.1℃
  • 맑음울산 20.0℃
  • 맑음창원 20.6℃
  • 맑음광주 18.4℃
  • 맑음부산 19.1℃
  • 맑음목포 18.7℃
  • 맑음제주 21.3℃
  • 구름조금천안 17.8℃
  • 맑음구미 20.0℃
기상청 제공

이슈

신기운 작가, 설계도로 그리는 정직한 회화

아트스페이스펄 개인전 ‘객관화 하기’…기술과 감성의 경계서 조형 언어를 묻다

 

[비건뉴스=최유리 기자] “설계도는 감정을 표현하진 않지만, 거짓 없이 구조를 드러냅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이 회화의 또 다른 방식이라 생각합니다.”

 

기술과 예술의 경계에서 회화적 실험을 이어온 신기운 작가가 지난 22일 오후 6시 대구 아트스페이스펄에서 열린 개인전 ‘객관화 하기(Objectify)’ 연계 프로그램에서 자신의 작업 철학과 창작 배경을 관객에게 직접 설명했다.

 

전시에는 3D 프린팅으로 구현한 입체 구조물에 울트라마린 블루 색면을 입히고, 흰 선으로 설계도를 덧입히는 방식의 회화·조각 복합 작업 20여 점이 소개된다. 비행기, 아파트, 만화 캐릭터 ‘아톰’ 등 작가의 기억과 기술적 오브제가 중첩된 이미지들이 시선을 끈다.

 

◇ 설계도는 회화인가, 기술 도면인가

 

 

신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설계도의 회화화’로 규정한다. 중학교 시절 기술 시간에 배운 제도가 지금의 표현 방식으로 이어졌으며, 구조적 사고와 시각 언어의 결합이 작업의 핵심이 됐다는 설명이다.

 

작업의 출발점은 2013년 무렵, 인터넷에서 우연히 접한 전투기 도면이었다.
“파란 선이 주는 아름다움과 기술적인 긴장감이 너무 강렬했어요. 구조물이 마치 감정을 담고 있는 듯 느껴졌습니다.”
이후 그는 기술 도면을 회화적 시선으로 바라보며 작업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설계도는 누락도 미화도 없이 사물의 본질을 전달합니다. 감정 중심의 회화와는 달리, 물성 그 자체를 전달하는 방식에 더 큰 진실성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는 설계도가 단지 기술 문서가 아니라 감정 이전의 진실을 담은 도상이라고 말했다.

 

◇ 파란색, 구조와 감성의 경계

 

신 작가의 작업에서 ‘파란색’은 단순한 배경색이 아니다. 설계도의 전통인 블루프린트의 색이자, 중세 성화에서 가장 값비싼 안료였던 울트라마린의 색이다.

 

“중세 화가들은 금보다 비싼 파란색으로 성모 마리아의 옷을 그렸습니다. 그 색을 쓸 수 있다는 것은 기술과 예술 양면에서 능력의 상징이었죠.”

 

그에게 파란색은 기술의 언어이자 감성의 징후로 작동한다. 공학과 회화, 정밀성과 직관을 동시에 품은 시각적 통로다.

 

◇ ‘정직한 회화’라는 개념에 대한 논의

 

이날 대화에 참여한 김옥렬 현대미술연구소 대표는 ‘정직한 회화’라는 작가의 표현에 대해 비평적 논점을 던졌다.

 

“예술은 본질적으로 허구와 상징의 언어입니다. 설계도의 기능적 정직함이 회화의 본질과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 질문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 신 작가는 “‘정직한 회화’라는 말을 처음 썼을 때, 이후 그 말이 과연 맞는 말이었는가를 꽤 오래 고민했습니다. 회화에서 ‘정직’이라는 개념 자체가 워낙 조심스럽잖아요.”
그러면서도 그는 “사물의 구조에 충실한 방식으로 감정을 끌어내는 회화도 가능하다고 믿는다”고 덧붙였다.

 

◇ 작업의 기원은 기억과 구조

 

전투기와 로켓, 그리고 오래된 아파트. 신기운 작가가 구현하는 대상은 모두 과거의 구조물이자 개인적 기억의 매개체다.

 

그는 작업과 삶의 경계가 없다고 말한다.
“할아버지가 갑작스레 돌아가셨을 때 저는 친척 집에 있었고, 부모님은 교통사고로 급하게 움직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장례식장에도 가지 못했어요.”

 

며칠 뒤 집으로 돌아왔을 때, 유품 상자 안에 자신의 이름이 적힌 쪽지를 발견했다.
“그걸 본 순간, 내가 뭘 해야 할지 어렴풋이 알겠더라고요. 그냥 화실에 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날이 12월 24일 밤이었다.
“아무도 없는 화실에 혼자 앉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그게 지금까지 이어졌습니다.”

 

그의 아버지 또한 화가였다.
“집의 절반이 작업실이었고, 제 놀잇감은 물감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회화와는 다른 언어를 찾고자 했고, 그것이 설계도라는 방식으로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 다음 작업은 ‘집’이 될 것

 

앞으로의 작업에 대해 그는 “이제는 비행기보다 ‘집’에 더 마음이 간다”고 말했다.
“집은 가장 가깝지만,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구조물입니다. 우리가 사는 공간의 기억을 구조화하는 시도를 더 이어가고 싶습니다.”

 

작가는 설계도를 그릴 때마다 “기억을 꺼내는 동시에 그것을 다시 조립하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그림이 감정이라면, 설계도는 기억의 도면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객관화 하기’ 전시는 회화가 감정의 언어라는 전통적 개념에서 벗어나, 기술적 언어와 개인 기억의 접점에서 조형 언어를 확장하는 새로운 회화적 실험의 장을 보여준다. 신기운 작가는 묻는다.
“기억을 정직하게 그리는 법은 무엇인가.”
그 대답은 파란 도면 위에서 여전히 그려지고 있다.

 

전시는 오는 31일까지 대구시 동구 효신로 30 지하 1층에 위치한 아트스페이스펄에서 열린다. 관람 시간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6시까지이며, 입장은 오후 5시에 마감된다. 휴관일은 월요일과 화요일이다. 관람료는 무료다.

배너
추천 비추천
추천
1명
100%
비추천
0명
0%

총 1명 참여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