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건뉴스=최유리 기자]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H5N1) 바이러스가 생우유로 만든 치즈 속에서 최대 120일 동안 살아남을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이는 비살균(非殺菌) 유제품의 안전성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며, 현재 시행 중인 식품 위생 기준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국제학술지 네이처 메디신(Nature Medicine)에 최근 게재된 미국 코넬대학교 연구팀의 논문에 따르면,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HPAI) H5N1 바이러스는 오염된 생우유로 만든 치즈에서 특정 산도(pH) 조건하에 최대 120일 동안 감염력을 유지한 것으로 확인됐다. 연구진은 “비살균 치즈를 통한 감염 위험이 과소평가돼 왔으며, 공중보건상 심각한 위협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H5N1 바이러스는 주로 야생 조류에 감염되는 인플루엔자 A형 바이러스의 아형으로, 최근 미국 전역에서 가금류와 젖소에 확산되고 있다. 특히 감염된 젖소의 우유에서 높은 농도의 바이러스가 검출되고 있으며, 낙농업 종사자 사이에서 사람 감염 사례가 보고되면서 인수공통감염병으로서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연구팀은 H5N1 바이러스를 혼합한 생우유를 이용해 세 가지 다른 산도 조건(pH 6.6, 5.8, 5.0)에서 치즈를 제조하고, 바이러스의 생존력을 분석했다. 그 결과 pH 5.0에서만 바이러스가 완전히 비활성화됐고, 나머지 조건에서는 120일이 지나도 감염력이 유지됐다. 또한 실제로 H5N1에 감염된 젖소의 우유로 만든 시판 치즈에서도 동일한 결과가 관찰됐다.
연구진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산성 환경에서 구조 변화가 일어나 감염력이 떨어지지만, 세포 외부에서는 이 변화가 오히려 비활성화를 유도한다”며 “pH 5.0 이하로 산도 조절을 하는 것이 바이러스 비활성화에 효과적”이라고 설명했다.
감염 실험에서는 H5N1에 오염된 생우유를 먹은 족제비가 감염됐지만, 오염 치즈를 섭취한 족제비에서는 감염이 확인되지 않았다. 연구진은 “치즈의 고형성이나 섭취 행태에 따른 노출 차이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며 “그렇다 하더라도 바이러스가 오랜 기간 생존할 수 있다는 점은 결코 간과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번 연구는 생우유 치즈의 안전성에 대한 현행 제도의 한계를 드러냈다. 미국의 현행 규정은 비살균 치즈를 최소 60일간 숙성시켜야 판매할 수 있도록 하고 있으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 기간은 H5N1 바이러스 비활성화를 보장하기에 부족하다. 연구진은 “현재의 숙성 기간 규정은 바이러스 생존 가능성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며 “보다 엄격한 기준 마련이 시급하다”고 밝혔다.
또한 연구팀은 요거트, 유청 등 다른 비살균 유제품에서도 바이러스 잔존 가능성을 조사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어 “54℃ 이상의 온도에서 15분 이상 가열하면 H5N1 바이러스가 완전히 사멸한다”며 “치즈 제조 과정에서 열처리를 적용하는 것이 안전 확보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번 연구는 비살균 유제품이 조류인플루엔자 전파의 새로운 매개체가 될 수 있음을 경고하며, 인체 감염으로 이어질 잠재적 위험성을 시사한다. 특히 오염된 생우유와 그 유래 제품이 장기간 감염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은 식품안전 관리체계 전반의 재점검을 요구한다. 전문가들은 “생우유 치즈나 비살균 유제품의 소비를 최소화하고, 철저한 위생 관리와 열처리 절차를 강화해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